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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정유산

유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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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애사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 지정일1974년 09월 27일
  • 시대조선 고종13년(1876년)
  • 소재지정읍시 진산1길 29-9 (진산동)

상세정보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이 정읍 초대현감(井邑 初代縣監)으로 선조(宣祖) 22년인 1589(乙丑)에 부임하였다가, 2년뒤인 선조 24년인 1591년 3월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이임(離任)하였으니, 정읍과는 깊은 인연이 있다.
그 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고 나서, 1681년의 숙종(肅宗) 7년(辛酉)에, 유림(儒林)들이 공(公)의 그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사우(祠宇)를 여아동(餘兒洞. 지금의 科橋洞)에 창건하였다가, 그 뒤 9년후인 1689년인 숙종(肅宗. 己巳)에 지금의 위치(位置)로 옮기니, 과교동 진산리(科橋洞 辰山里)이다.

영조(英祖)때 유애사(遺愛祠)라는 사액(賜額. 王이 看板을 주는 것)을 내렸다. 그 날짜는 알려있지 않다.
유애(遺愛)는 유애재민(遺愛在民)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1798년인 정조(正祖) 22년(戊午)에 집의(執儀) 유희진(柳希津)을 더 제사(祭祀)하고, 1854년인 철종(哲宗) 5년(甲寅)에 주부(主簿) 유춘필(柳春苾)을 더 제사지내며, 사당(祠堂) 이름을 충렬사(忠烈祠)라고 고쳐 불렀었다.

1868년 고종(高宗. 戊辰) 11년(甲戌) 3월에 전북도내 유림(儒林)들의 발의(發意)로 공의(公議)가 되어, 본래의 유애사(遺愛祠)라는 이름으로 되돌아 갔다.
주벽(主壁)에 충무공 이 선생(忠武公 李 先生), 동무(東 )에 집의 유 선생(執儀 柳 先生), 서무(庶務)에 주부 유 선생(主簿 柳 先生)의 단을 만들어 제사지냈다(設壇享祀).
비각(碑閣)을 세울 때 언덕에다 설단(設壇)했으나, 지금은 헐렸고 대신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집의공 유희진(執儀公 柳希津), 주부공 유춘필(主簿公 柳春苾)이라고 새긴 비석 3개가, 충무공을 중심을 하여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1876년인 고종(高宗. 丙子) 13년 3월에 남아 있는 그 땅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을 세웠다.
1963년 구미동(龜尾洞)에 이충무공(李忠武公)만 모시는(單設) 충렬사(忠烈祠)가 창건되었다.
1974년 9월 27일에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기념물(記念物) 18호로 지정되면서, 유애사(遺愛祠)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제사(祭祀)를 받는 인물(人物)은 다음과 같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 세종(世宗) 27년에, 한성(漢城) 건청동(乾淸洞)에서 태어났으며, 병조참의(兵曹參議) 거( )의 증손(曾孫)이고 정(貞)의 아들이었다. 그는 1598년인 선조(宣祖) 31년에 돌아갔으니 그 때 나이 53세이다.

덕수(德水) 이씨(李氏)이며 자(字)인 본이름 대신 부르기를 여해(汝諧)라 했고, 1576년인 선조(宣祖) 9년에 식년(式年) 무과(武科) 병과(丙科)에 급제(及第)하였다.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 사복사주부(司僕寺主簿), 조산포 만호(造山浦 萬戶),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89년인 선조(宣祖) 22년 12월에 초대 (初代) 정읍 현감(井邑 縣監)을 지냈다.

1591년 2월에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 水軍節度使)에 올라, 군비확충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다음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했다.
거북선(龜船)을 만들어, 바다 싸움(海戰)에서 왜적(倭敵)을 처 부수고, 1598년인 선조(宣祖) 31년 11월 1일에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전사(戰死)하였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 시조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선무공신일등(宣武功臣一等)에 서훈(敍勳)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서(追敍)되었고, 좌의정(左議政)의 벼슬을 내렸다.

1643년인 인조(仁祖) 21년에 충무(忠武)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온양(溫陽) 현충사(顯忠祠)에서 제사(祭祀) 지낸다.

유희진(柳希津)

고흥유씨(高興柳氏)로 어른이 된 뒤 부른 이름(字)은 택민(澤民)이요, 호(號)는 신암 (信巖)이었다. 그는 의사(義士)였다.
1558년인 명종(明宗) 13년(戊午) 2월 13일에 지금 정읍시 북면 승부리(井邑市 北面 承富里)에서 태어났다.

1583년 임실 현감(任實 縣監)을 거쳐 1588년인 선조(宣祖. 戊子) 8월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로 내직(內職)에 들어 갔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였다.
동생 희사(希泗)와 이수일(李守一 : 李一齋의 子), 윤황(尹 ) : 務安), 김부(金溥 : 羅州) 등과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와 군량(軍糧) 35석(石)을 장성 남문(長城 南門)에 있는 의청(義廳)에 운반하고, 11월 24일 오봉(鰲峯) 김제민(金齊閔)과 직산(稷山)과 수원(水原)까지 진군했다가, 다음 해 화의(和議)가 성립되어 돌아왔다.

1597년인 선조(宣祖) 30년(丁酉)의 정유란(丁酉亂)에 남라령(南羅嶺. 속칭 나나리등. 지금의 北面 承富里)에서 적을 무찌르고, 동생 희사(希泗) 희문(希汶)과 같이 순절(殉節)하였다.

1798년 정조(正祖) 22년에 사헌부(司憲府) 집의(執儀)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장성(長城) 오산사(鰲山祠)와 정읍(井邑) 유애사(遺愛祠)에서 제사(祭祀) 모신다.

유춘필(柳春苾)

조선(朝鮮) 선조때 의사(義士)이다.
고흥 유씨(高興 柳氏)이고, 어른 되어 부른 이름은(字)는 국형(國馨)이고 호(號)는 단구(丹邱)이니, 유희진(柳希津) 공(公)의 칠촌숙(七寸叔)으로 1566년인 명종(明宗) 21년(丙寅)에 지금의 북면 승부리(北面 承富里)에서 태어났다.
1585년인 선조(宣祖) 18년에 무과(武科)에 올라, 벼슬이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가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김제민(金齊閔) 김경수(金景壽 : 長城), 유희진(柳希津)과 함께 장성 남문(南門)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11월 24일 서울로 진군(進軍)하다가 여산(礪山)에 있는 황화정(皇華亭)에서 의곡(義穀) 백여섬(百餘石)을 좌수영(左水營)에 보냈다.
정유란(丁酉亂)에 가동(家童)을 거느리고, 고을의 북쪽에서 적군을 맞아 싸우는 가운데, 말이 넘어져 적에게 잡히게 되어 순절(殉節)하니 뒤에 사람들이 이곳을 가르켜 한마교(汗馬橋)라 부르니 지금의 한교(漢橋 : 지금 北面에 있는)이다.

遺愛祠 廟廷碑文(유애사 묘정비문)

아!아!우리 忠武李公의 精한 忠과 높은 功이 天地에 떨쳐 빛이 있고, 史記에 번쩍한 빛이 비쳐서 세상에 두르니, 비록 마을 童子도 傳誦하고 사모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더욱 오래하고 더욱 간절함으로, 金石의 刻과 俎豆의 享祀가 있어 한이 없으니, 牙山顯忠祠같이 設立은 써 더욱할 수가 井邑의 遺愛祠에 이르러서도, 또한 公의 백성에 다다라 仁으로써 하고, 백성을 어루만짐을 義로써 證驗함이 간뒤에 發함이니, 아름답고 장하도다.

公의 諱(휘. 이름)는 舜臣이요, 字는 汝諧(여해)요, 그 先系는 德水人이니, 領中樞府事 貞靖公 諱 邊이 그 顯祖요, 再傳에 (거)는 兵曹參議인데, 燕山朝에 臺官으로 彈劾이 嚴正 하여, 有虎掌令이라고 일컬으니 公의 曾祖가 되고, 考貞은 秉節校尉인데, 公의 功으로 左議政에 德淵府院君이 贈職되고, 어머니는 草溪卞氏니 將土郞 守林의 女이다.
公이 仁祖 乙巳로 써 서울 乾川洞에서 출생하니, 「이」갈때부터 호탕(豪宕)해서, 억누르지 못하고 빼어나서 크게 거만함이 있어, 詩書를 일삼는데 즐겨하지 않고, 마침내 붓을 던지고 武科에 오른다.
그 武經을 講함에, 考官이 張良이 赤松子를 從遊함을 물은데, 公이 말하기를, 綱目에 留侯 張良이 卒이라고 쓰니, 考官이 크게 놀라고 말하기를, 이것은 武人이 알 바가 아니라고 했다.

栗谷先生이 吏曹判書를 맡을세, 西厓(서애)로 因하여 보기를 要求하니, 公이 말하기를, 同宗이 비록 義가 두터우나 判書때에는 不可하다 하고, 마침내 가지를 않았다.
咸鏡道 童仇非權管을 歷任하여, 벼슬로 訓練院에 들어가 친한 바가 있어, 公을 끌어다 越遷하고자 하거늘, 公이 法을 지켜 허락을 않고, 겁으로써 위협하되 屈하지를 아니하니, 庚辰 에 鉢浦(발포)萬戶가 되었다.

左水使 成基가 官衙뜰에 있는 梧桐을 베어가져 가고자 하거늘, 公이 그 不可로 論했더니, 그 뒤에 水使가 方伯으로 더불어 會議하여, 公을 내리추고자 했다가, 都事 重峰先生으로 因하여 떨어드림을 얻지 못하고, 壬午에 南兵使 李庸戈軍官이 되었다가, 乾原權官으로 옮겨서는, 孼(얼)胡弓只乃(日本人)를 사로잡으니, 朝廷에서 장차 公을 포상하려고 하는데, 忌하는 자가 있어 일이 잠잠해졌다.

司僕寺主簿로 써 나가서, 造山萬戶가 되어, 因하여 鹿道屯田을 맡으니, 賊이 침범해 와서, 公이 連射進擊하여 被捕된 南女六十餘人을 奪還하니, 公을 誣告한 자가 있어 功이 도리어 罪가 되었거늘, 임금께서 白衣로 功을 다지라는 令을 하고, 己丑에 全羅監司가 말씀을 드림으로 因하여, 本道 助防將이 되었다가, 잠시 武臣兼宣傳官에 옮겼고, 西厓가 朝廷에 천거하여 井邑縣監에 임관하였다.

兼官으로써 泰仁에 들으니, 그 때 泰仁은 오래 비어 있어, 文案이 많이 쌓였는데, 決裁를 빨리 處理하고, 百姓 사랑하기를 아들같이 하니, 심히 治聲이 있었다.
都事 曺大中이, 鄭汝立의 逆賊獄事에 말이 連累되어, 좇아 詣理(예리)를 입을세, 金吾郞 이 文書를 찾아 取하다가, 公의 答問書를 보고 간단히 公에게 말하여 버리고저 하는데, 公 이 말하기를, 내 글에 다른 말이 없고, 또 이미 찾는 中에 있으니, 올리지 않으니 不可하다고 하더니, 마침내 對質한 바가 없었고, 曺公의 靈柩가 고을 앞에 지나가니, 公이 奠(전)을 갖추고 哭送하니, 꾸짖는 사람이 있는데, 公이 말하기를 曺公이 不眼하고 죽으니, 그 罪를 가히 알지 못하고, 겨우 本道使客으로 지내니, 가히 恝視(괄시)하지 못한다 했다.
庚寅에 高沙里僉使에 올라, 또 滿浦僉使로 오르니, 臺諫이 소나기 陞進으로써 여쭈었으니 끝이고, 辛卯에 珍島郡守로써, 加里浦僉使로 천거되었다.

公이 항상 倭侵으로써 근심하더니 거북선을 創作하고, 鐵鎖를 부어 만들어, 가로 鎭口를 끊어, 賊을 막을 計策을 썼더니, 壬辰 四月에 왜놈이 크게 처들어와, 釜山 東萊를 함락하거늘, 公이 諸將을 모아 일을 꾀하고, 慶尙右水使 元均으로 더불어, 閑山島에서 모이기로 언약하여, 玉浦 앞바다에 倭船을 보니, 닻을 바다 가운데에 머물러, 나머지 군사를 나누어, 마을 집을 불태우고, 公이 諸軍을 독촉하여, 배 二十六隻을 불사르고, 明日로써 決戰을 언약했다. 이 때에 임금이 義州에 있어서, 聲聞이 不通하다가, 이김을 올림에 百官이 서로 축하하고, 벼슬에 나아가 嘉善大夫가 되었다.

이로부터 露梁의 싸움에, 한 배를 불살라 부쉈고, 추격하여 泗川바다에 이르러, 거북선으로 하여금 배 十척을 불사르고, 賊의 彈丸에 公이 맞았으나, 公은 오히려 활을 잡고 화살을 쏟아, 督戰을 마지 않았더니, 싸움이 파함에 미쳐 사람으로 하여금 뾰족한 칼을 써서 排出하니, 한 軍人이 비로소 알고 놀라지 아니함이 없었다.
唐浦의 싸움에 二十여척을 빼앗았으니, 秀吉이가 쓴바 金부처를 얻었고, 唐項의 싸움에 배 百여척을 불사르며, 二百여명을 베니, 일이 알려져 資憲大夫에 오르고, 閑山島의 싸움에 배 六十척을 불사르니, 이때 倭陣에서 敗死者가 九千餘에 달했다.
安骨의 싸움에 四十여척을 불사르며, 二百여명을 베이니, 軍聲이 크게 떨쳤고 正憲大夫의 벼슬에 올라,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本職을 거느리는데 처음같이 하고, 하여금 總制舟師 를 얻었다.

公이 이김으로써, 교만이 생겨남으로 諸將을 경계하고, 軍餉(군향)이 이으지 못함으로써, 몸의 근심을 삼아, 魚鹽을 걷우고, 屯田을 부지런히 하고, 무릇 나라를 이롭게 하여, 軍人에 도움으로써, 한바에 용감히 가며 돌아 보지 아니하니, 察使 李公 元翼이, 晉州에 들어가 公과 더불어 兵事를 商議하다가, 公으로 하여금 裁斷하니, 公의 決定에 敏捷하여 모두 다 마땅함을 얻었거늘, 李相이 탄복하더라.

丁酉에 倭寇(왜구)의 再侵에 媒蘖(매얼)이 있어, 朝廷이 公으로써 逆襲에 능치 못함으로 下獄하고, 元均으로 대행하니, 길에 있는 男女老少가 소리내어 슬피 울었다. 獄에 가친 것을 알고 임금이 용서하여, 白衣로 元師陣中에 보내어, 하여금 罪를 쓰고 정성을 다했더니, 그 해 七年에 元均이 敗하고, 公이 다시 統制使가 되니, 새로 폐함의 나머지 배에 기계가 탕진해서 있으메 없거늘, 公이 혼자 말을 타고 달려, 이르러 全羅右水使 億秋를 불러서, 管下諸將을 불러 모으고, 兵船十三척을 收拾하여, 푸른 바다 가운데에 머뭇거리니, 보는이가 위태롭다 하였다.

밤에 이르러 賊이 헤엄쳐서 군사가 옴으로써 스스로 일어나, 큰 소리로 꾸짖고 諸軍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말라 하고, 右水營 嗚梁바다 가운대로 回軍을 하였다.
먼저 湖南士庶가 배를 타고 避難한 자가 다 陣下로 모이거늘, 公이 衆寡로서 막음으로 먼저 避難을 명령하되, 次第로물러나고, 열을 지어 진을 펴니, 군사들이 의심을 하고 스스로 戰艦을 거느리고 앞에 當하여, 각기 스스로 노를 재촉하여 곧 나아가라고 명령하니, 旗가 海中에 가득했다.

이때에 이른 潮水가 바야흐로 물러가고, 港口는 水勢가 빨라서 순조롭게 내리며 船行이 화살과 같았다. 敵의 三十一척을 부수고 公이 乘勝追擊하니, 敵이 감히 抵抗을 못하고 온 군사가 물러 갔다. 승리를 임금이 듣고 크게 기뻐하여, 楊經理에게 보이니, 經理가 紅緞과 銀子 若干을 보내면서 포상하고, 임금이 崇政大夫 陞進의 말이 있었으나 그쳤다.
秀吉이 죽음에, 行長이 빨리 撤軍을 꾀하는데, 우리 舟師가 앞을 막을까 두려워하여, 가만히 劉綎 陳璘 天將에게 길 비켜줄 것을 간청하니, 두 天將이 허락하고저 하거늘, 公이 木片 密書로서 그 잘못을 諷刺하니, 陳公이 얼굴이 붉어지며 그치고, 行長이 또 公에게 鳥統 長劒(장일) 二個와 酒肉을 보내거늘 公이 엄숙한 말로 물리치고, 陳공으로 더불어 露梁애 맞아서 싸움에, 行長은 隆摩州軍으로써 當하니, 이가 倭敵의 最强한 勇敢이 되었다. 새벽 二時에 都督을 둘러 치니, 심히 急하거늘, 公이 곧 앞에 救하는데,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손수 북을 쳤더니, 갑자기 彈丸을 맞고 쓰러지니, 卽 戊戌 十一月 十九日이다.

전날 밤에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니, 보는 이가 괴이하게 여겼다. 公이 죽음에 죽었다고 말을 말라고 경계를 하고, 都督이 公의 죽음을 듣고, 배에서 엎어지고 쓰러지기를 세 차례나 하였다. 난민의 哭을 하였고, 선비들이 글을 쥐고 致奠(치전)을 하고, 婦女가 길을 막고 소리내어 哭을 하니, 哭聲이 千里를 進하고, 임금이 官員을 보내어 弔祭하여, 左議政 德豊府院君의 贈職과, 宣武一等功臣에 策錄하고, 무릇 公이 戰伐의 地와 生長의 고을과 遺愛의 곳에 俎豆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順天의 忠愍과 海南의 忠義 등 十數處이고, 여기는 그 하나이다.

이 祠字가 肅宗 辛西에 創建되어 있다가, 九年後 己巳에 余兒洞으로부터 辰山里로 移建하고, 正祖 戊午에 信巖 柳公 希津으로써 追配하고, 哲宗 甲寅에 또 丹邱 柳公 春苾로써 追配하여, 忠烈로 改額을 하였다.
信巖의 字는 澤民이니, 高興人으로 明宗 戊午에 출생하여, 壬辰의 亂에 前宗廟署副奉事로 倡義하여, 千人에 가까운 募兵을 하여, 군사를 나누어 金健齊의 晉州 싸움을 돕고, 여러 百石 穀을 하여, 배로 龍灣(義州) 임금 있는 곳으로 보내고, 金鰲川(김오천) 景壽와 金鰲峯 齊閔으로 더불어 義軍을 거느리고, 稷山 振威멸의 땅에 이르니, 宋經略應昌이 和議를 주장하거늘, 군사를 거느리고 南下하다가, 李統制가 智勇의 士를 選拔함을 듣고, 本郡義士 李良 崔彦環 孫 中 등 三人을 거느리고 가, 절하고 參謀하다가 丁酉亂에 倭軍이 갑자기 이르거늘, 아우 希泗 希汶 및 一鄕同志로 더불어 發軍하니, 縣北南羅領까지 追擊하여 賊의 칼 세 자루를 빼앗고, 二十餘名을 베이니 賊이 다 쓰러졌다.

公은 기운이 다하여, 목이 말라서 숙이고 샘물을 마셨더니, 賊이 다시 이르러서 드디어 害한바가 되니, 後人이 그 싸운 곳을 이르기를 倭終洞이라 하고, 샘을 이르기를 「義士泉」이라 했다.
壬辰亂에 義穀을 모으고 義兵을 모으다가, 丁酉에 이르러 力戰殉身하니, 贈職事로 禮曹가 거듭 아뢰여 裁可를 내리여 司憲府執義에 贈職하니 正祖 戊午다, 豊墅(풍서) 李孝貞公 敏輔가 墓表를 撰하였다.

丹邱의 字는 國聲이요 高興人이니 信巖의 從叔이다. 明宗 丙寅生으로 힘써 張巡傳을 읽다가, 雷萬春事에 이르메 무릎을 치며 탄복하고 칭찬하여 참으로 丈夫라 하고, 붓을 던지고 武科에 오라 宣傳官을 歷任하여 軍資監主簿에 이르니, 壬辰에 擧義하여 兵粟(병속)을 모아, 배로 五十石을 左水營에 수송하니, 統制 李公이 장하도다 하며 허락하고, 말하기를 험한 곳을 건너고, 위험을 무릅쓴 용맹이 雷萬春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다.
安竹間에 移軍하여 敵要塞를 꺽었더니, 天將이 和議를 주장함에 군사를 거느리고 南下 하여, 뜻밖에 일어날 근심을 對備하고, 丁酉再亂에 縣北까지 賊을 追擊하니, 왜놈 장수 雲忠이 大軍을 거느리고 갑자기 이르니, 奪擊大破하여 斬獲함이 심히 많았다.
敵이 흩어졌다가 다시 합하여, 화살과 돌이 흐르는 것 같았고, 公이 화살이 다하고 힘이 다하여, 말이 갑자기 등을 구부림에, 드디어 敵에게 빠지니, 敵이 그 용맹을 아깝게 여겨, 萬端으로 달래며 위협하는데, 公이 꾸짖음이 입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害를 입으니, 後人들이 그 힘을 써 싸운 곳을 이름하기를 汗馬橋라고 하고, 빠짐을 입은 곳을 이르기를 馬洞(마국동)이라고 하고, 崔勉菴 益鉉이 碑銘을 撰했다.
슬프다, 내가 陳都督이 公을 稱함을 보니, 天下를 經論으로 다스리는 재주와, 하늘이 도운 날이 목욕한 功이 있다 하니, 이제 감히 의론 붙이지 아니하고 및 두 柳公의 高忠大義에 이르서는, 비록 가히 忠武로 더불어 같지는 않으나, 그 兩壁에 配食한즉 가히 이르되 千秋 에 公案이니 누가 泰山과 北斗와 같이 우러러 하지 않으리요.

이 祠宇가 高宗 戊辰에 毁撤(훼철)되었다가, 六年後 甲戌에 設壇享祀하고, 二年을 넘어 丙子에 遺墟碑가 서고, 倭政때에 이르러 여러번 彈壓을 입었는데에도 오히려 撤享을 아니하고, 光復後 甲寅에 碑가 全羅北道 文化財로 되어 遺愛祠로 還額하고, 丁巳에 神室과 講堂을 建立하고, 그 뒤로부터 따라서 補修하여 今日에 이르러 完美하니, 그간에 金郡守 東喆과 全議員 鍾千과 鞠局長 承 과 院長 金仁煥의 功이 가장 크다, 趙市長 明根이 飜瓦와 蓄墻(축장)하고, 韓國을 통하여 立碑하여 心力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公이 겨울에 나를 찾아와 朝庭碑文을 請하니, 秉彛(병이)가 있는바에 어찌 감히 사양하리야, 酩에 이르기를 東國의 大亂은 壬辰 癸巳에 더할나위 없다.
임금의 수레가 떠나 避難하고, 生民이 魚肉이 되었네, 八道의 臣民이 盡忠竭力하여, 임금을 따라 宣武함이 中興을 이에 얻었네, 아아 李公은 어려서부터 英特했네, 龜船을 처음 만들어 바다를 절제하고 賊을 막으니, 功을 세우고 충성을 의논함에 그 右에 더 없었네, 戰績 이 미친 바에 俎豆를 아니함이 없네, 하물며 이 楚山은 遺愛의 고을 이네, 百里誦慕가 지금도 어제 같으네, 公議가 있는 바에 훼철한 祠堂이 復設했네.

麾下 두 公이 東西로 配食하니 趙市長이 와서 살핌에 이 높은 碑를 세우니, 나가고 들어 오메 우러러 봄에 생각을 더욱 여와 같이 하리라.


檀紀 四三二五年 壬申 六月 日 立.
黃 州 邊 時 淵 撰
慶 州 金 權 鎭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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